때로는 ‘공부생활자’라는 기품있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그때마다 ‘무슨 이런 개인적 편견을 듬뿍 얹은 칭찬의 말이 있는가’라는 생각으로 진정 쑥스러운 표정이 되어 대답하곤 한다. “공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배움을 좋아하는 것뿐이에요.” 

한동안 방송대학교에서 여러 학과를 섭렵하던 시기에는 ‘취미가 공부’라 말하며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취미 항목으로 잘못 분류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공부라 하면 각 잡고 책상에 앉아 해야 할 일 같은 데다가 내 머릿속 어휘사전에는 공부보다 배움이 좀 더 겸손한 분위기의 단어로 저장돼 있기 때문이다. 공부 혹은 배움이란 단어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는 내게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공부생활자를 자처하며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공부와 배움의 바이브가 모두 내 안에 배어버렸다. 

‘나의 끝은 나의 시작이다’.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옷감에 자수로 새겨 넣은 문장이다. 내 배움의 시작과 끝은 오로지 책이다. 공부가 하고 싶어지면 서점부터 간다. 지하철 무임승차가 합법적으로 가능한 연령에 도달해 이제는 머리 싸매고 공부해야 할 나이로부터 명백히 멀어졌지만 아직도 서점에서 ‘읽으면 천재가 되는 책’, ‘공부를 잘하는 법’ 등의 표지 글이 보이면 견딜 수 없이 소유하고 싶어진다. 

뇌 기능을 최적화해서 능력을 열 배로 끌어올려준다는 뇌과학자의 신간을 발견하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이런 책을 읽으면 절반의 노력만 들여도 두 배의 공부 효과를 얻을 것 같아 관심이 쏠린다. 그리하여 이해력, 집중력, 암기력, 문제응용력 등 듣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내용의 책을 붙들고 나는 어느새 지갑을 열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때때로 지갑을 너무 성급하게 열지 않기 위해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책 표지를 들춰 목차를 살펴본 다음 서문을 읽어보고 작가의 글이나 번역 후기까지 읽어보며 구매까지의 시간을 유예하는 나름의 묘수이다. 그래봤자 결국에는 ‘어머, 이 책은 꼭 사야 해’라는 마음으로 계산대 앞으로 가는 루틴을 반복하지만 말이다. 

도서관에서 사서로 오래 일하며 매일 책을 만지다가 퇴직 후 책과 멀어지는 상상에 견딜 수 없던 순간이 있었다. 그런 상황을 막고자 50대 중반에 번역가를 겸업하며 ‘투잡러’로 일했다. 그 덕에 시간을 붙들어 두고 싶을 만큼 바빠져서 동네 서점에 가는 시간을 살짝 줄였다. 대신 온라인 서점의 신간 목록을 클릭하는 것으로 오프라인 서점에 가지 못해 비어버린 시간을 야무지게 채웠다. 정년퇴직한 요즘은 번역 작업을 하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기분 전환을 위해 동네 서점에 간다. 

새로운 책을 만나는 향락의 시간을 주는 서점은 지금의 내게 새로운 학교나 다름없다. 최근에 만난 선생님은 이케가와 유지의 《최적의 공부 뇌》라는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바로는 ‘잘 외워지지 않는 정보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뇌의 해마를 속여야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내용이 가장 인상적이다. 해마는 ‘삶에 꼭 필요한 정보인가?’라는 기준으로 정보를 버릴지 기억할지 결정하는데, 삶에 꼭 필요한 정보로 인식하게 만들려면 반복해서 머리에 정보를 입력하라는 것이 초반부 핵심 내용이다. 익히 들어온 ‘학습은 반복훈련’이란 말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내용을 접하며 또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나는 지금까지 《노인과 바다》 원서를 뜻을 모르는 영어단어들을 체크하며 여덟 번가량 정독했다. 여덟 명의 친구와 각각 한 번씩 읽다 보니 그렇게 됐다. 뜻을 한번 외웠는데도 까먹고 다음번에 또 밑줄 치는 경우도 있지만 읽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모르는 단어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 반복의 기술이 학습에 뛰어난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 틀림없다. 이 책은 매우 얇으므로 모르는 영어단어가 하나도 없을 때까지 꾸준히 읽을 생각이다. 얼마나 반복해야 밑줄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나게 될지 궁금해서라도 멈추고 싶지 않다. 

친구와 책 읽는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정년퇴직 후 내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만드는 일이었다. 시간을 자유롭게 설계할 수 있는 ‘인디펜던트 워커’가 되자 그동안 쌓아놓은 책들을 읽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중단하지 않고 오래 독서를 즐길 수 있는 나름의 해결책은 친구와 함께 읽는 것이었다. 혼자 진지하게 공부하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놀러 다니듯 배우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껍고 어려운 내용의 책을 여럿이 모여 읽는 모임도 만들었고 일대일로 만나 원서를 읽는 모임도 만들었다. 그로 인해 글 쓰고 번역하는 시간, 집안 살림을 하는 최소한의 시간 외에는 모조리 책을 읽는 일에 쏟는 이상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오늘도 함께 서점에 가고 원서를 읽고 공부할 친구를 찾는다. 그러고 보니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해야 하는 공부가 없어지면, 좋아서 하는 공부를 만들면 된다. 공부할 거리가 있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므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면 슬픔에 빠지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