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자랐던 동네에는 ‘농촌진흥원’가 있었다. 그만 그만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그곳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나무마다 농작물마다 이름표가 붙어있어서 그것을 보며 식물 이름과 나무 이름을 외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 외웠던 나무 이름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나무는 박태기나무. 안타깝게도 요즘 박태기나무는 보기 어렵지만, 간혹 오래된 주택의 정원에 남아있는 그것을 보면 그때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꽃과 나무를 좋아하다 보니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한 꽃집이 나의 천직이 되어버렸다. 1990년 직장생활을 시작하여 2년여의 세월을 보내며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흥미로 유학을 결심하게 됐고, 그 비용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에 시작한 꽃집을 8년이나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며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얻은 결론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꽃과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50~60세에도 멋지게 이 일을 하려면 좀 더 전문적인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길로 독일 플로리스트 과정을 가르치는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오신 페터아스만 선생님의 수업을 듣고 서른이 넘어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한 이 일이 나를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깨달음에 가슴 벅찬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당시 통역을 해주신 선생님께 독일어 수업을 부탁드려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언젠가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3여 년간 독일어 과외, 독일어 학원을 통해 꾸준히 공부했다.

2005년, 드디어 독일에서 플로리스트 마이스터를 공부할 기회가 왔고, 나는 고민 끝에 기회를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년여 동안 마이스터 과정을 공부했고, 2006년 한국으로 돌아와 프리랜서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10년 봄, 한남동에 플라워카페 블뤼테를 오픈했다. 처음에는 작업실을 염두에 두고 공간을 보러 다녔는데, 한남동의 공간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이 꽃과 식물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아틀리에 공간에서 카페 공간으로 콘셉트를 바꿨다.
꼭 사지 않더라도 차를 마시며 꽃과 식물들을 편안하게 즐기고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공간,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가는 현대인들이 편안하게 한숨 돌릴 수 있는 힐링의 공간을 꿈꾸며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5년 동안 운영한 후, 지금은 3년째 상수동에서 가드닝 카페 블뤼테를 운영 중이다.

블뤼테는 내가 꽃과 식물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공간이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공간에 식물과 꽃으로 장식된 곳들이 많아졌다. 참으로 기분 좋은 변화이다. 한 송이의 꽃, 작은 화분 하나는 자연의 축소판이며 일상에서 가깝고 쉽게 자연과 여유를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꽃과 식물로 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체력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다. 작업할 꽃을 사기 위해 새벽시장을 가야 하고, 농장들을 다니며 필요한 식물을 구해야 한다. 상업공간에서의 작업들은 대부분 영업시간이 아닌 새벽 시간에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은 꽃과 식물이 주는 긍정적인 에너지 덕분이다. 다양한 공간(예를 들면 대형서점, 카페나 백화점, 호텔 등 상업 공간)에서 즐겁게 하는 이 작업들을 통해 나처럼 많은 분도 좋은 에너지를 느끼며 함께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 이처럼 공간을 이해하고 그것에 알맞은 꽃과 식물을 작업하며 기쁨과 보람을 얻는 이 일의 또 다른 매력은 늘 새롭다는 것이다. 새로운 다른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이 직업은 그래서 아주 매력적이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공간에서의 새로운 작업을 행복한 마음으로 계획하고 있다. 새로운 만남, 새로운 자연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