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060호 ‘백자 철화 끈 무늬 병’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희대의 명작이다. 16세기 관요에서 구어 낸 이 병은 형태가 유려하고 빛깔도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목에서 걸쳐 내려온 끈 무늬가 일품이다.
본래 백자 병은 기본적으로 술병이다. 순백자 병은 대개 제주 병이어서 엄숙한 분위기가 있지만 일반 술병에는 술맛을 돋우기 위해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선비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대나무나 난초 그림. 또는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등을 취향에 따라 아주 다양하게 그려 넣었다.
옛날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술병을 사용할 때면 대개 병목에 노끈을 동여매 걸어놓곤 했다. 그래서 이태백의 ‘술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네’라는 뜻의 <대주부지(待酒不至)>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술병에 푸른 끈 동여매고
술 사러 가서 왜 이리 늦기만 하나
그런지라 도공은 이 술병을 만들면서 거두절미하고 병에 매달린 끈을 천연덕스럽게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런 것이 조선의 멋이고 해학이다. 우리 학생들은 이 병을 ‘백자 넥타이 병’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있다.
내가 이 병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나는 중앙일보사 ‘계간미술부’에 입사하여 ‘한국의 미’ 시리즈 ‘백자편’의 편집을 맡고 있었다. ‘백자편’을 편집하면서 나는 미공개 명품을 소개하기 위해 당대의 안목으로 이름 높은 한국플라스틱의 서재식 회장님을 찾아갔다.
서 회장님은 처음엔 경계하는 자세로 나를 대했으나 내가 백자편을 위해 준비한 도판 사진을 보여드리자 점점 얼굴이 풀리면서 ‘이건 천하의 명품입니다’하며 도판을 즐기다시피 하셨다. 그리고는 딱 한 점만 공개하겠다며 몇 날 몇 시에 자택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유물 촬영을 위해 명륜동 서 회장님 댁에 당도하여 거실로 들어서니 듬직한 강화반닫이 위에는 조선 초기 순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서 회장님이 미리 준비해 둔 오동 상자를 직접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으셨는데, 그처럼 빛깔이 곱고 형태미가 아름다운 백자는 처음 보았다. 그것이 그 책 표지에 실린 16세기 ‘백자 편병’이다.
촬영을 마치고 나오는데 기둥에 걸린 가족 스냅 사진을 보니 놀랍게도 나와 미학과 67학번 동기로 당시 미국에 가 있던 서영석 형이 들어 있는 것이었다. 너무도 반가워서 내가 아드님과 동기동창이라고 하자, 서 회장님은 나보다 더 반가워하면서 몇 점 더 공개해줄 테니 한번 정양모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며칠 후 서 회장님 댁을 방문하였더니 이번엔 18세기 ‘백자 청화 화조문 병’과 17세기 ‘백자 철화 화훼문 병’을 보여주시고 도록에 싣도록 해주셨다. 그리고는 비공개 전제하에 진짜 비장품을 보여주시겠다며 오동상자를 하나 가져와 정 선생님이 꺼냈는데 바로 ‘백자 철화 끈 무늬 병’이었다. 이 병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휴!”라는 감탄사를 크게 내고 말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서 회장님은 이 병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시면서 애호가로 일생을 산 것을 스스로 기념하셨다. 그때 서 회장님은 나에게도 소품 하나를 기념으로 줄 테니 ‘걸기대’ 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얼마 후 서 회장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이 끝난 후 서영석 형은 아버님이 약속한 ‘걸기대’라며 ‘백자 소병’ 하나를 내게 주었다.
훗날 나는 도예가 한익환 선생께 이 병을 재현해 보시라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잘 익어가다가 그만 화도가 높아 철채가 녹아 버렸다”며 마냥 아쉬워하시면서 실패작이라 깨 버릴까 하다가 자네 주려고 가져왔다고 하셨다. 그리하여 나는 끈이 녹아 흐른 이 ‘백자 넥타이 병’을 지금도 거실 한쪽에 잘 모셔 놓고 조석으로 보며 살고 있다.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박사.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 문화재청장 역임. 저서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8, 일본편 1~4) 등 다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저작상(1998),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 수상. 現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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