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촬영은 여름이었다. 여느 여름과 달랐다. 이제 (조연출의 ‘조’ 자를 뗀!) 어엿한 연출이었다. 드디어 (조감독의 ‘조’ 자를 뗀!) 드라마 감독이었다. 쿵쾅쿵쾅,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얼마나 설렜는지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꾹꾹 눌러 참아야 했다. 흥분으로 밤을 꼬박 새워도 졸리지 않았다. 이른 아침, 선글라스를 챙겨 촬영장으로 향했다. 멋있어 보이고 싶었다. 천재적인 연출력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고 싶었다. 민망한 고백이지만, 그 시절 나는 그 정도의 패기는 갖고 있었다. 오만함은 시작하는 자의 특권이니까.
바야흐로 나의 첫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제목은 <너의 마녀>, 주인공은 두 남자 사이에서 마음을 헷갈려 하는 여자였다. 유능하고 이성적이지만 차가운 남자A와 어리고 편안하지만 비현실적인 남자B. 뻔한 구도, 흔한 삼각관계였지만 나는 진지하게 이야기에 몰입했다. 친한 작가 언니가 대본을 썼는데, 우리는 여자의 선택, 그러니까 그녀가 A에게 돌아가야 하느냐, B와 시작해야 하느냐, 둘 다 관둬야 하느냐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러는 가운데 배가 고파오면 양념치킨을 시켰다. 치킨을 뜯으면서도 토론은 이어졌다. 나는 그녀가 B와 연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사랑이 이뤄졌으면 했다. 드라마 속에서라도. 드라마니까. 드라마니까 좀 행복하면 어때. 그런데.
막상 촬영현장에 서자 나는 머뭇거렸다. 마음을 밀어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조명기가 켜지고 카메라가 돌기 직전, 그녀 역을 맡은 배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여기에서 제가 좀 더 확실하게 화를 내야 하지 않을까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정신 차려, 초짜의 미숙함을 들켜선 안 돼. 나는 감독답게 근엄해 보이려 애썼다. 그 바람에 부자연스럽게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러면 주인공이 미워 보일 것 같은데요. 너무 세지 않게, 적당한 선에서!”
촬영은 여름에 끝났다. 편집 등 후반 작업이 이어진 뒤, 방송은 가을이었다. 경건하게 홀로 TV 앞에 앉아 나의 첫 드라마를 감상했다. 수십 번도 더 본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부족한 것만 자꾸 눈에 들어와서 아쉬웠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장면. 그녀가 옳았다. 그녀는 그 장면에서 좀 더 확실하게 화를 냈어야 했다. 그래서 더 확실하게 미워 보였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런 게 사람이니까. 그게 진실이니까.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누구도 ‘적당한 선에서’만 머물며 살 수는 없으니까. 그 장면은 어설펐다. 이도 저도 아니었다. 더 화를 냈어야 해. 확실하게 표현했어야 해. 자책하며 깨달았다. 나는 그녀였다. 미워 보일까 봐 두려웠던 사람은 나였다. 더 용감했어야 했다. 더 분명하게 나를 드러냈어야 했다. 내 이야기였다.
드라마 속 그녀는 끝내 B와 시작하지 못했다. B는 사라져버렸다. A와의 안이한 현상유지, 그녀는 사랑에 실패했다. 미워 보일까 봐 화내기를 주저했기 때문이었을까. 더 확실하게 자기 마음을 살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녀의 사랑은 끝까지 이도 저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지막 장면. 그녀는 B의 흔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 드라마는 거기에서 끝났지만 진심으로 그녀가 B를 만나러 달려가길 바랐다. 이제부터라도 진심으로 화내고 슬퍼하고 사랑하길 바랐다.
첫 드라마가 방송되었지만, 세상은 깜짝 놀라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다음 날 아침,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는 걸 보며 현실 타임이 와서 좀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나는 드라마 연출자가 되었다. 으스댈 것도 대단할 것도 없이, 그저 꾸준하고 성실하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정확하게 표현하고 과감하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작자이기를, ‘처음’과 함께 결심했다.
<너의 마녀>는 지금까지도 신기한 위안이 된다. 가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두려움은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길이며, 나를 드러내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처음을 해냈으므로 또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이미 첫발자국을 뗐으니 그저 걸어가면 된다고. 처음처럼 늘 그녀는 옳다. 나는 나아질 것이다. 나는 나아갈 것이다. 서툴렀던 첫, 모든 것의 시작이었던 나의 ‘첫’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