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김주원(41)의 언어는 늘 새롭게 피어난다. 중력을 거슬러 창조된 몸의 언어는 보편적인 언어가 되어 관객들에게 말을 건다. 아홉 살에 처음 토슈즈를 신고, 볼쇼이 발레학교 우등 졸업, 발레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ce) 수상(2006),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1998~2012)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발레 인생은 처절한 자기 자신과의 분투였다. 연습실의 불을 가장 먼저 켠 것도 가장 나중에 끈 것도 바로 그녀였다. 흐트러짐 없는 자기관리로 한 마리의 우아한 백조처럼 날아오른 그녀는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라는 단단한 알을 깨고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서고 있다.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에서 발레의 대중화에 힘써온 그녀가 이번에 선택한 언어는 ‘연극.’ 고선웅 연출의 <라빠르트망 L’appartement>에서 여주인공 리자 역을 맡게 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Mich interessiert nicht, wie die Menschen sich bewegen, sondern, was sie bewegt).” 탄츠테아터(Tanztheater)를 구성한 혁명적인 무용가 피나바우쉬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렇다면 김주원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적 욕망을 발산하게 될 이번 도전이, 예술의 동력이 궁금해졌다. 대본 리딩을 마치고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간 어느 날,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그녀를 만나보았다. 가녀린 체구, 가늘고 긴 목선, 허리를 일자로 곧게 뻗고 사뿐히 걸어오는 그녀는 영락없는 발레리나였다.

Q. 발레, 한국무용, 뮤지컬, 오페라 등 ‘춤의 언어’로 무대에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극이다. 각오가 남다를 것 같은데.

거창한 각오까지 할 주제는 못 된다(웃음). 일단 감정의 기승전결을 다른 차원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어서 설레고 감사하다. 모든 예술은 단순히 테크닉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것에 드라마를 담아서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하지 않나. 인물들의 감정선을 익히고 연기적인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이번 작업이 앞으로 더 설득력 있고 깊이 있는 춤을 출 수 있게 해줄 것 같다. 지난 6월에 재연한 댄스시어터 <컨택트>에도 대사가 나오지만, 너무 짧아서 제대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현재 하나씩 알아가는 단계라 단언할 순 없다. 다만 연출님과 배우들의 내공이, 그리고 에너지가 대단해서 좋은 호흡이 될 것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웃음). 마크 역의 (오)지호 오빠는 자기보다 상대방을 빛나게 해주는 배우이고, 앨리스 역의 (김)소진씨는 연기를 너무 잘하는 배우다. 모두로부터 하나씩 배우는 자세로 임하고 있다.

Q. 고선웅 연출은 이 작품을 ‘내가 사랑할 때, 나를 사랑했던 누군가의 이야기’라고 했다. 인물관계와 갈등구조가 모두 담긴 한마디다.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해피엔딩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니까.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인생과 인간의 이면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20년 전 처음 원작 영화를 봤을 때는 사랑을 채 알기도 전이었다. 그때는 리자와 막스의 사랑이 마냥 좋았고, 실제 연인이 된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도 너무 아름다웠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는 앨리스에 감정이입이 되더라. 누구에게나 못난 부분, 콤플렉스가 있지 않나. 나도 그렇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것들을 보여줄 수 없다. 그래서 알리스에 더 공감이 가고 매력적이었다. 인간에게는 동전처럼 양면성이 있으니까. 연출님도 그런 부분들 때문에 이 작품을 연극으로 풀어내려고 하지 않았을까. 질 미무니 감독에 대한 오마주로 인간의 섬세한 감정과 묘한 심리 변화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계신다.

Q. 김주원이 만들어낼 ‘리자’가 궁금하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대사나 장면이 있다면.

막스와 앨리스의 감정의 흐름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시점이 매우 중요하다. 그 사이에서 신비롭게 그려지는 인물이 ‘리자’이다. 원작의 리자에 연출님이 바라는 리자가 수렴되고, 최종적으로는 내 목소리와 몸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김주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모니카 벨루치와 나는 외모부터가 확연히 달라서 색다른 리자가 될 것이다(웃음). 막스와 알아가는 과정에서 한 말이 기억난다. ‘연애는 그럭저럭 했어. 나는 밋밋한 게 싫어. 아주 뜨겁거나 아주 차가운 게 좋아’라는 식의 대사인데, 리자의 성격이 나와 닮아있다. 사랑도 일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뜨겁게 해야 하는 면이. 예술가만의 감정과 감성이 정말 있나 보다. 

Q. 올해로 데뷔 20주년이다. 그동안 성실히, 잘 흘러왔다.

마침 원작 영화도 20주년이다(웃음). 현재 프로 생활을 하면서 여러 무대를 경험하고, 김주원이라는 아티스트가 마흔한 살의 몸으로 표현하는 춤이 어떤 것인지 인지하고 점을 찍고 가자는 게 기념비적인 공연이나 거창한 계획보다 더 중요하다. 내 작품에 명분과 의미가 있어야 하니까. 오늘 했던 작품보다 내일 할 작품이 더 깊어져야 하고. 얼마 전, 디스크가 터지고 심한 부상을 당하면서 춤을 그만둬야 할 지경까지 갔다. 고된 재활운동을 하는 내 뒷모습이 짠했는지 병원에서 그러더라. 지금 움직이고 춤출 수 있는 상황 자체가 기적이라고. 그래서 20주년에 도전하는 이 작품은 아티스트로서 성장할 수 있는 자양분이자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Q. 국립발레단 퇴단은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 같다.

국립발레단은 철옹성처럼 안전한 보호막이었다. 보장된 환경에서 보장된 작품들만 할 수 있었고, 최고의 스텝들과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가장 충만할 때 떠나자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왔었다. 내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국립발레단의 언어가 되고 행보가 되니 행동의 제약도 있었다. 무엇보다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 내가 선택한 작품들을 자유롭게 해보고 싶었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라는 수식어를 떼고 ‘아티스트 김주원’으로 살아보고 활동해보고 싶었던 거다. 여전히 궁금한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설레는 것도 너무 많다. 아직 철이 덜 들었나 보다(웃음).

Q. 해외 진출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

‘브누아 드 라 당스’를 수상하고 로열발레단 등 5개의 유명 발레단에서 제의가 있었지만, 국내에 남았다. 이보다 앞서 볼쇼이 발레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도 국적 때문에 입단하지 못했던 경험도 있다. 이방인으로서 좌절을 겪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더라. 아마 국립발레단에 없었다면 상을 못 받았을 거다. 최태지 단장님의 제의로 인연을 맺고 15년간 가슴에 태극기를 꽂고 살았다. 중요한 건 ‘어디서 추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추느냐’이다. 지금은 외국 안무가들이 가장 일하고 싶은 곳이 한국이다. 해외에서 주역을 하는 친구들도 국내에서 만들어진 후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성 높은 무용수들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다. (강)수진 언니 때는 더 꽃을 피우고 있고. 그런 자긍심이 누구보다 컸다.

Q. 인간 김주원, 아티스트 김주원으로서 앞으로의 바람이나 계획이 있다면.

인간 김주원, 여자 김주원으로서 다시 사랑하고 싶다. <라빠르트망>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웃음). 교수로서(성신여대)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지체장애인들을 프로무용수로 만드는 새로운 계획도 있다. 한국무용가 이정윤 씨, 현대무용가 김성용 씨와 함께 적절한 매소드를 개발하고 그들을 위한 전문 단체를 만들고자 한다. 휠체어 무용단의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하나의 예술이었다. 춤의 깊이와 정신이 엄청나더라. 몸의 예술을 해서인지 남 일 같지 않다. 내게는 작은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조차 힘든 상황이지 않나. 감사히도 부모님, 국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았고, 운 좋게 관객들의 사랑도 받았다. 스포트라이트와 혜택을 받은 순수 예술가로 살아온 것이다. 이제는 내 능력치 안에서 재능 기부를 하고, 그동안 받은 것들을 사회에 환원하는 좋은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  

#그녀는 자신을 “노력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천재”라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매 순간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천재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계선을 넘기 위한 무한한 예술의 동력이. 그렇게 미완성의 예술가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김주원’이라는 무대 위에서.

글. 김신영 기자

사진: ⓒE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