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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병원 가기 싫어하는 내가 감기로 어쩔 수 없이 병원 출입을 하고 약봉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지인이 이번 감기가 왜 지독하냐고 묻기에 “시국을 닮아가는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럴듯한 진단이라며 웃었다. 설마 감기가 세상을 닮아가련만, 그렇게라도 핑계거리를 만들어 늘 내가 피해자인 듯 세상을 탓하며 살아가는 듯해서 씁쓸했다. 하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부닥치면 남 탓을 하거나 세상 탓을 해서 스스로 위안을 받는 게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느 민화작가는 그림을 그리다가 실수로 먹물이 튀면 계획에 없던 벌이나 개미 같은 벌레들이 생겨나고 나비나 매미가 그려지기도 한다고 했다. 고양이가 발에 물감을 묻힌 채 그림을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그 발자국마다 계획에 없었던 나비나 새를 그렸다고 했다. 물론 처음에는 놀라 소리를 지르며 그림을 버리기도 했겠지만 상황을 탓하지 않고 응용했기 때문에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귀한 보물로 알려진 팔만대장경 5,200자를 딱 한 글자로 응축하면 마음 ‘심(心)’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마음 밭이 있는데, 향기 나는 꽃을 키우다가도 때로는 가시덤불을 키우고 꽃과 가시덤불을 섞어 키우기도 한다. 남의 탓을 하고 핑계거리를 애써 찾는 것은 가시덤불을 키우는 것이고 내 탓이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 밭에 꽃을 피우는 것이리라. 주사 맞고 약을 먹어도 독해빠진 감기가 낫질 않아 누워 있다가 친구가 보내준 문자를 보고 웃었다.
‘어느 고승께서 지팡이 한 개를 방바닥에 놓고 손대지 말고 짧게 만들어 보라고 화두를 던졌다. 하루 종일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어린 동자가 지팡이 옆에 긴 막대기를 놓자 고승께서 길고 짧은 것은 상대적이라는 가르침을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내 마음을 툭 건드린 그 문자를 읽고 옛 생각을 했다.
대학 4학년 여름에 문학반 후배들과 등산을 했는데, 저녁 무렵 급히 하산하다가 나무뿌리에 발이 끼어 앞으로 넘어지는 바람에 무릎 연골을 크게 다쳤다. 여럿이서 번갈아 업고 내려왔지만 의사는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태라며 앞으로 한쪽 무릎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기말고사를 앞둔 때였고 학군단 예비장교로 여름방학기간에 4주간 드센 병영훈련을 받아야 하기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머니는 시골에 용한 의사가 있다며 급히 귀향하라고 했다. 시골집에 내려갔지만 별 차도가 없어 평생 장애를 갖고 살게 될 것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나는 산을 원망하고 굼뜬 후배들을 미워하며 길 안내를 한 녀석을 책망했지 급한 내 성미에 지름길을 고집한 것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연신 뜨거운 물수건으로 내 무릎을 찜질하던 어머니는 내 등짝을 가볍게 때리며 말했다.
“죽어도 글쟁이가 되겠다고 했으니 싸돌아다니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글만 쓸 작정이면 다리가 그런들 무슨 걱정이냐. 엄살 부리면 평생 절뚝거리며 살지만, 젊은 삭신이니까 자꾸 부려먹으면 제까짓 게 안 낫고 배기겠냐. 네 작은아버지를 봐라. 그 높은 데서 떨어져 겨우 살아나서 두 다리가 부러졌지만 송곳으로 쑤신 듯 아픈 걸 참아가며 악착같이 걸어 다니더니 저렇게 두발로 다니잖느냐. 죽기 살기로 덤비면 살고 그렇잖으면 평생 기죽는다.”
요즘 같으면 무식하고 매정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의술이 발달하기 전의 어머니의 닦달은 내게 오기를 심어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모진 통증을 견디며 걷고 또 걸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꺼지기 전에 건너려고 서두르다 쓰러지기도 했고 계단을 내려갈 때 헛디뎌 자빠지기도 했으며 다리를 절며 걷다가 헛딛고 넘어지기도 했다. 병영훈련을 받으며 몇 번이나 쓰러져 꼴찌로 수료하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산을 잘 타고 잘 걷는 사람이 되었다. 책상 앞에 앉아 글 쓰는 게 직업이기에 움직이거나 걷는 일이 적을 수밖에 없는데, 그 당시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지금 이만큼이나마 건강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옛말이 지금껏 가슴에 남는다.

ⓒ 홍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