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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 말 한국전쟁 휴전 협정이 맺어지기 직전,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아버님께 인사를 드렸다.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것이 아버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버님은 베이지색 하복에 파나마 중절모자를 쓰고, 언제나처럼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셨다. 아직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밤중에 화장실에 가려고 마루에 나오면 아버님 서재에는 항상 불이 환하게 밝혀 있었다. 어린 마음에 몰래 들여다보면 아버님께서 벽에 여러 점의 서화를 걸어 놓고, 손에는 백자나 청자를 들고 어루만지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시 어린아이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느낄 수 있었다.

아버님은 한마디로 문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선비이셨다. 가족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하셨고, 우리와도 잘 놀아주셨다. 주말이면 큰 방에 모두 모이게 하여 2천 장 가까이 갖고 계셨던 외국 심포니와 오페라 레코드를 들려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세계 최고 연주가의 음악과 오페라 가수의 공연에 친숙해질 수 있었다. 미술 시간에는 직접 주제를 정해 “오늘은 운동선수를 그려보자”고 제안하며 흥미를 유발해 우리 형제들 모두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데, 완성한 그림은 직접 채점까지 해주셨다.

아버님께서는 휘문고보 시절 야구부 주장을 지내셨고, 졸업 후에도 한국 최초의 사회인 야구팀을 창설해 활동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때 야구부에 들어갔을 때도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며 기본자세부터 훈련을 도와주셨다. 내가 미국 유학 중에 동양미술사를 공부하며 궁금한 점이나 필요한 자료가 있어 연락드리면, 미국에 없는 책들을 손수 분본(分本)하고 공부하기 좋게 다시 제본해 보내주신 일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오래된 문화재 컬렉션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간송 컬렉션 또한 숱한 고난을 겪으며 오늘까지 지켜졌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 문화부에서 모든 유물을 평양으로 가져오라고 지시받은 두 명의 지도원이, 아버님이 문화재를 보관하고 계셨던 보화각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당시 국립박물관 직원이던 혜곡 최순우 선생,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에게 상자를 짜서 짐을 싸도록 시켰다. 그러나 그분들이 순순히 협조할 리 없었다. 상자를 짤 마땅한 목재가 없다, 못이 부족하다, 다리를 다쳤다 등 핑계를 대며 지연작전을 썼다. 그 사이 전황이 북측에 불리해지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측 지도원들은 빈손으로 도주했고 문화재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때 만들어둔 상자들로 1·4후퇴 때 문화재를 부산으로 피난시켰으니 새옹지마 같은 일이었다.

부산에서는 영주동에 창고를 빌려 지금은 이미 고인이 된 형과 내가 문화재를 지켰다. 원래 목재 창고로 쓰던 곳이라 겨울철에는 매우 추웠다. 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휴전이 되자 가족 모두 서울로 환도했고 문화재들도 함께 보화각으로 돌아왔는데, 문화재 이전을 마친 열흘 뒤 영주동 일대에 큰불이 나서 창고가 전소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야말로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이 심혈을 기울여 수집하고 지켜내신, 아버님의 혼이 담긴 간송 컬렉션을 지키기 위해 나는 미국에서 귀국한 1965년부터 전쟁 중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보화각을 재정비하고 소장품을 정리했다. 이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해 동생(전영우, 현 간송미술관장)과 최완수 선생(현 민족미술연구소장) 등이 실무를 맡아 유물 목록 작성 등 본격적인 사업을 진행했다. 1971년 가을, 문화재를 보관해온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이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면서 <간송문화(澗松文華)> 제1호를 발간하며 겸재 전시를 열어 일반 공개를 시작하였다. 그 후 40여 년 동안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전시를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열었고, 2014년에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해 현재 동대문 DDP에서 제6부 간송문화전 풍속인물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기억 속의 아버님 주변에는 항상 옛것들이 함께 있었지만, 당신께서는 한 번도 왜 유물을 좋아하게 되었고, 왜 우리 문화재들을 수집하고 보호하는 일을 하시는지 우리에게 자세히 이야기해주신 적이 없다. 그러나 백 마디 말보다 묵묵한 실천을 통해 문화재의 소중함을 보여주셨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그 뜻을 지켜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간송 컬렉션을 국제적으로 홍보하면서 아버님의 위대한 업적을 소개하고, 미술관을 신축하여 소장품을 효율적으로 전시하는 일에 힘쓰며 아버님으로부터 비롯된 문화 보국의 길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간송미술문화재단 홈페이지 http://kansongpatr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