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웃음꽃으로,  마음 속 굽이굽이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얼어붙은 들녘을 녹이고 다시 찾아올 봄을 맞이할 시간, 그 인고의 방에는 타인을 향해 등이 굽어간 한 노수녀가 머물고 있다.
1968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자신의 몸을 두고 타인을 섬겨온 공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2016)을 수상한 그녀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 호암마을의 강칼라 수녀(75)이다. 반세기 동안 한센인, 결핵 환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동행해온 그녀는 백발이 무성해도 마음만은 풍성하다. 계절의 변화에도 무심해지고, 일상의 특별함도 망각해버린 요즘, 그녀와의 만남은 봄이 오는 소리와 같았다. 그 청아한 음들을 들어본다. 

# 매일 새롭게, 매순간 뜨겁게

그녀의 일상은 보통 새벽 5시 반에 시작되어 자정까지 이어진다. 매일 같이 거동이 불편한 마을 노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약과 음식들을 챙기고, 은행일과 장심부름까지 도맡아 하면서 밤낮으로 분주하다. 때로는 새벽 2~3시에도 노인들의 긴급 전화를 받으면 직접 운전해서 그들을 병원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한다. 거의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법도 한데, 그녀는 매일이, 매순간이 새롭다고 한다. 
“물론 지루할 수도 있죠. 하지만 매일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어제 조금 힘들었다고 멈추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죠. 생활의 작은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해요. 비질 한 번, 설거지, 빨래에도 다 뜻이 들어있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하면 더 쉬워져요. 두 다리 뻗을 수 있는 방 한 칸이, 따뜻한 지붕과 포근한 이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이렇게 이태리식 커피도 마실 수 있잖아요(웃음).”
겨울의 끝자락, 인터뷰가 진행된 동혜원 공소(公所)1) 옆 낡고 오래된 집(수녀원)에는 그녀의 삶의 지향이 곳곳에 녹아있었다. 손가락 한마디만한 몽당연필을 온힘으로 꾹꾹 눌러가며 노인들 대신 꼼꼼히 이것저것 정리해주는 모습, 세월의 먼지가 내려앉은 구식 시계의 초침과 분침에 켜켜이 쌓인 일상의 찰나들, 소박한 식기류에 담긴 조촐한 식사와 담소들 사이로 최소한의 삶, 빈자(貧者)의 여유와 부유함이 흘러넘쳤다. 비움으로써 채워진다는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 
“(시간적)여유가 조금 더 생기면 좋겠어요. 제때 해야 할 일을 다 못하면 마음이 무거워요. 그래서 늘 죄책감이 들죠. 더 가까이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싶고, 더 많이 기도하고 싶은데… 무능력해요. 사실 ‘있는 그대로’ 감사해야 하죠. 스스로에게, 또 상대방에게도. 어떤 대가나 요구도 없이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발이 마치 생강을 닮았다 하여 ‘생강발’이라고 부른다. 변형성 관절염을 앓고 있지만, 이미 치료시기를 놓쳐서 부르트다 못해 고목처럼 딱딱해진 탓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한센인 정착촌이든, 달동네 판자촌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간 고단한 삶이, 세월의 흔적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것은 아닐까. 남들을 돌보느라 정작 자신은 돌보지 못했으면서도 “10년, 다시 5년 전에 다행히 인공관절 수술로 두 무릎을 살려내서 이렇게 잘 걷고 있다”고 소녀처럼 웃으며 급히 화제를 돌린다. 불편할 순 있지만 불행하진 않다는 것이다. 
“몸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요.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서 더 잘하고, 더 큰 힘이 되고 싶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그저 ‘가까이’에 머무는 것 밖에….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간다는 것에 희망이 있어요. 이는 결국 신뢰와 연결되죠. 포기할 때는 과감히 포기하고 용기내야 할 때는 용기 내면서 발맞춰 나가야 해요. 힘들어도 조금씩 개미걸음으로라도 걸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죠. 노력과 인내를 바탕으로요. 우리는 가족, 늘 가까이에 있는 존재잖아요. 가족이라면 모두 받아들이고 품어주고, 넘고 또 넘어서야 해요. 종교, 신앙을 떠나 먼저 부모와  친구, 그리고 이웃과 사랑하며 받은 것들을 예사로 넘기면 안돼요. 모든 것들이 보배니까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바위에 흐르는 물처럼 돼버리죠.”

# 인생의 큰 바위 얼굴로

‘달로네 리디아’, 그녀가 19세에 수녀가 되기 전까지 불리던 본명이다. ‘칼라’라는 이름은 천주교 신부를 하던 중 유명을 달리한 오빠를 기리기 위해 그의 세례명 ‘카를로(Carlo)’의 여성명인 ‘카를라’를 붙인 것인데, 한국에서는 발음 편의상 ‘칼라’가 되었다. ‘강’씨 성은 옆집에 살던 한센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받게 된 것이다. 6살 위의 언니도 방글라데시에서 평생 수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데, 4남매 중 여동생 가족만이 이탈리아에 남아있다고 한다. 48년 전, 무려 4번의 환승을 거쳐 지구 반 바퀴를 돌아 겨우 발을 내딛은 한국이라는 낯선 땅은 이방인의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전부가 되었다. 하지만 종교와 신앙을 차치하더라도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는 푸른 눈의 이방인이었던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제 고향 쿠네오(Cuneo)2)도 한국처럼 산이 많아서 자연환경에는 금방 적응했어요. 문제는 언어와 문화였죠. 사고방식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많았어요. 우리가 보통 표현할 때, 까만색, 흰색 별로 없잖아요. 처음에는 상대방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실수도 엄청 했죠(웃음). 그러면서 하나씩 배웠어요. 포기하는 법도, 일상의 여유로운 대화법도. 그런데 나쁜 것은 쉽게 포기하는데, 좋은 것은 오래 걸렸어요. 정말 못됐죠(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말이 가장 힘들었어요. 연세대 어학당에서 배울 때는 ‘젊으니까 배우면 되겠지’ 했는데, 만만치 않았죠. 인내심과 겸손,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묻고 또 묻고, 익히고 또 익히면서 넘어선 장벽들은 타인과의 공존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한센인의 자녀들이 교육적 혜택에서 제외된 현실에서 교육청에 의견을 개진해 마을 인근에 초등학교 분교를 설립하는 데 일조했고, 일반 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직업 교육의 기회를 마련하는 등 교육에도 힘을 썼다.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개인이 사회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길은 ‘교육’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일상과 학교생활은 하나로 이어져야 해요. 안 그러면 저절로 절름발이가 될 수 있죠. 그만큼 가정교육도 중요해요. 가정이 바로 서야 내 자신이, 나라가 바로 서니까요. 어떤 나라든 교육을 위해 많은 투쟁을 해왔어요.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죠. 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은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제 역할이에요. 최근에는 마을 노인들이 도자기 수업을 통해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아가고 있는데, 정말 기뻐요. 이 나이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창작으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은 자신을 치유하고 사랑하는 방법이죠.”
타인을 잊고 나를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길은 그저 아득하기만 할까. 완전한 자기긍정의 길을 찾는 여정에서 만난 그녀는 인생의 큰 바위 얼굴로 다가왔다. 자신을 긍정할 때 비로소 타인을 긍정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인자한 미소에 실어 나지막하게 들려준 것이다. 다시 한 번 긍정의 힘을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