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 3살에 피아노를 시작해서 12살에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내가 피아노를 진정으로 만난 것은 1999년도였다. 당시 프랑스는 살인적인 태풍이 몰아친 겨울이었고, 내 마음도 벼랑 끝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고향도, 친구도, 가족도 언어도 없는 타국에서 이방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프랑스인의 차가운 눈총이었다. 그들은 나를 적대시했고,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던 나는 스스로를 대변하거나 그들을 달랠 수 없었다. 겨우 12살이었던 내가 그들에게 이방인으로 비칠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전 세계인이 다 알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국경도 문화도 필요 없는, 가슴과 가슴으로, 영혼에서 영혼으로 통하는 언어. 그것은 한국어를 쓰고 읽기 전에 먼저 배운 모국어, 바로 ‘음악’이다. 종이 위에서 춤추는 음표들은 콩나물과 같았고, 피아노의 음성은 내 목소리이며 따뜻한 엄마 품과 같은 언어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날이었다. 음악시간에 선생님께서는 나를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림(Lim), 앞으로 나와서 피아노 연주를 해보렴.” 당황한 나는 설레는 마음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걸어 나갔는데, 언제 어디서나 피아노만 보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일어났다. 마치 오래 보지 못한 옛 친구를 만난 기분처럼. 특히 피아노가 있을 법하지 않은 곳, 즉 기차역, 공항, 길거리, 혹은 당시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들만 있던 교실에서는 더욱 그랬다. 원수처럼 행동하던 그들에게 어떻게 가장 사랑스럽고 친절한 언어로 소통하란 말인가!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그들의 공격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공격적인 표현을 해도 음악의 본질 자체는 이타적이라서 우리를 위로하며 치유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고통이 음악으로 표현되는 순간,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면서 치유된다. 그 순간 음악은 고통을 받아들이며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다. 결국 나는 쇼팽의 ‘흑건’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오른손이 흑건반만 연주해서 ‘흑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곡을 시작한 순간,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나와 흑건만 존재했다. 장난기 넘치고 재미있는 이 곡을 연주하면서 어느새 나는 12살의 소녀로 돌아갔다. 이방인이 된 사실도 잊어버리고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공간에서 피아노 건반과 함께 재밌게 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된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묘한 침묵이 교실을 덮었다. 그 짧은 순간,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 명 한 명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모두가 동시에 박수치며 찬사를 보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해서 눈물을 흘렸다. 쉬는 시간이 되자 반 아이들은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 진심으로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음악은 가능하게 해준 것이다. 나도 너희들과 같은 한 아이일 뿐이라고. 그저 너희들처럼 생각하는 머리와 느끼는 심장이 있다고. 서로 다른 개성과 모습이지만 우리 모두 한 인간일 뿐이라고.

피아노는 두려움과 어색함을 극복시키면서 내 마음 그대로를 전달해 주었다. 단 몇 분의 음악은 9천 킬로미터의 거리가 떨어진 다른 문화와 언어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 피아노는 나와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가장 멋있는 다리이자 고유한 언어가 되었다. 내 영혼은 피아노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게 되었고, 그때 나는 진정으로 음악을 만났다.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닌 사명으로 다가왔을 때, 직업이 아닌 존재의 이유로 다가왔을 때. “음악은 유니버설한 언어”라는 표현은 언어의 개념을 뛰어넘어 ‘생존키트’로 다가온 것이다.

예전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2번을 들을 때는 그저 아름답다, 멋있다 정도였고, 너무 오래 듣고 있으면 멀리서 웅웅거리는 소리로 느껴졌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치던 어느 날, 춥고 어두운 교회 안에서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이며 듣던 이 곡의 화성들은 내 모든 세포가 되어 모든 것을 정화시켰다. 무궁무진한 화음과 멜로디의 변화에 몸을 맡기며 천태만상의 뉘앙스와 춤을 췄다. 강렬한 쓰나미처럼 다가오는 환희에 공포를 느꼈고, 의식은 사방으로 산산조각 났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갑자기 끝없이 넓은 대서양을 본 것이다. 진짜 여행은 한국과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9천 킬로미터가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33센티미터 여행이었다. 그 콘체르토를 ‘진정으로’ 들은 후, 그 곡을 오케스트라와 연주하는 솔리스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훗날 기적적으로 그렇게 된다면 나는 천 장의 천국행 티켓이 부럽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 순간 이미 천국에 있을 테니.

18년 후, 나는 런던, 부에노스아이레스, 함부르크, 상파울로, 서울 등, 전 세계를 순회하며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연주회를 하면서 이 콘체르토를 수없이 연주하고 있다. 그때마다 내 심장은 환희로 가득 찼고,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12살부터 간절히 기다린 기적을 실제로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은 정말 가능할까.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의 첫 코드를 쓰다듬을 때, 비로소 나는 함께 감동의 도가니에 빠질 오케스트라와 청중에게 둘러싸여 있음을 깨닫는다. 연주 때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움과 놀라움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내 가슴에 샘솟고 있는 감사함의 폭포수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국행 티켓을 청중과 나누는 것도. 언제든 더 찬란한 빛을 비추며 입장해야 하니까.

사진: ©BOM Arts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