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에 대한 동상이몽

늘 바쁘게 일 나가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에 익숙했던 가족은 “오늘부터 아빠가 출근하지 않는다.”는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막상 일에서 물러나게 된 아버지는 오죽하실까? 언젠가 누구나 겪어야 할 ‘은퇴’이건만, 무언가 잘못된 것만 같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다. 우리 시대 ‘은퇴’라 는 말이 달갑지만은 않은데, 은퇴에 대한 아버지와 자녀 세대의 감춰둔 속내를 살짝 들여다보았다.

 

겉도는 나의 인생
59세, 6년 전 건설회사 소장으로 은퇴
쉰넷,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 회사에서 나가주기를 바랐다. 본사에서 계 열사로 보직 발령을 내더니 이방인 취급은 물론 일을 주지 않았다. 결국, 어 쩔 수 없이 정년퇴직 3년을 앞두고 사직서를 내고야 말았다. 그때는 ‘아내가 일하니 어떻게든 되겠지.’ 마음을 추슬렀다. 이제까지 열심히 일했는데 쉬 어볼까 하다가도, 우리 부부 노후는 고사하고 아파트 대출과 아들 결혼 자 금, 딸 대학 등록금을 생각하면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다 아내가 아는 사람이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이라 말만 하면 뽑아준다고 옆구리를 찌르 는데 영 내키지 않아서 거절해버렸다. 이 나이에 부장급까지는 바라지 않지 만 갑자기 아파트 경비라니…. 그러나 한편으로 내 나이에 어디 가서 무얼 하나, 면접이나 볼 수 있을까 눈앞이 캄캄하고 두려워졌다. 집에서도 이방인 취급은 마찬가지다. 퇴직하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 아질 줄 알았는데 야근한다, 학교 간다, 아르바이트다, 친구 모임이다, 평 일이고 주말이고 집에 들어올 줄 모르니 도통 얼굴 볼 시간도 없다. 어쩌다 식사라도 할라치면 무슨 얘길 해야 할지 머뭇거리다 끝난다. 월급 척척 꽂 아주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집안일, 자녀 양육은 일절 모르고 살았다. 그 러다 직장에서 밀려나고 집에서도 겉도는 것 같아 속이 쓰리고 헛헛하다.

 

왜 계속 ‘섬’에 계세요?
29살, 중소기업 계약직 사원
아빠가 은퇴하셨을 때, 처음에는 가족을 위해 평생 고생하신 아빠를 행복하 고 편안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마음에 들게 조심하고 함께 시 간도 많이 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다. 평소 아침에 정신없이 출근하느라 옷가지 정 리를 제대로 못 하고 나갔다가 저녁에 대학원 입시 준비 때문에 늦게 들어 올 때가 많아서 주말에 몰아서 방안을 정리해왔다. 그런데 일거수일투족 지 켜보신 아빠가 “왜 야무지지 못하고, 시간 관리를 못 하느냐?”고 자꾸 잔소 리하셨다. 나름 나의 생활 방식인데 인제 와서 아빠 생각을 강요하시니 답답 하다. 대화로 풀어보려고 했는데 ‘철딱서니 없다’는 핀잔만 들었다. 물론 그런 아빠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다. 전에는 큰소리도 치시고 당 당하게 가족 여행 계획도 아빠가 세우고 저녁 메뉴 이것저것 해 놓으라는 말씀도 곧잘 하셨다. 요즘 혼자 우두커니 앉아 계시거나, 뭐든 너희 좋을 대 로 하라고 하시고, 공원 산책하러 가자고 해도 귀찮다고 손을 내저으신다.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 한다고 의기소침해지신 걸까? 우리와 잘 어울리셨 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겠다.

 

짐이나 안 되면 다행이지
64세, 개인사업 운영
아들은 내 사업이 성장할 가능성도 없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그만하라고 한 다. 하지만 지지부진해도 우리 부부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다. 결혼한 아 들 부부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기도 하다. 젊었을 때는 ‘갈 때 되 면 미련 없이 가야지.’ 하면서 보험 하나 안 들고 살았는데, 막상 나이 들어 병원에 들락날락하니 괜한 호기를 부렸나 싶다. 아들네 부담 주는 것 같아 서 미안하고, 남의 집 귀한 딸 데려다가 시부모 부양하게 하느냐는 말이 나 올까 며느리 눈치가 보인다. 며느리가 자기 아버지는 공무원이라 퇴직 연 금이 나온다는 얘기를 무심결에 했다. 그런데 나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 린가 싶어 뜨끔했다. 우리 때야 부모님 모시고 사는 것이 당연했지만, 의학이 발전해서 우리도 얼 마나 오래 살는지 알 수 없고,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자식들 제 생 활 꾸려가기도 쉽지 않으니 자식만 바라보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애들 입에서 ‘회사생활 힘들다’ ‘우리는 삼포 세대, 오포 세대’라는 투정이 흘러나올 때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젊음이 있고 배곯고 사는 것 도 아닌데 왜 좀 더 치열하게 살지 못할까? 우리보다 배운 것도 많고 누리 고 사는 게 많은데 못 할 게 없지 않나? 우리 때는 한겨울에 지게 지고 친척 집에 고구마 얻으러 산 두 개를 넘어다닐 정도로 어려웠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자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많지만, 구닥다리 같은 잔소리로 여 길까 봐 입을 꾹 다문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
36세, 금융업 종사
사업하는 아버지는 호쾌한 모험가셨다. 그런데 이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세가 많이 꺾이신 건지 안정적이지 않은 일에 는 손대지 않으신다. 나도 사회생활 시작하고 세상 보는 눈이 생기면서 좋 은 사업 아이템을 제안하는데 ‘사업이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하시며 고개를 저으신다. 내 의견대로 하면 사업을 키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나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생기고 보니 아버지를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 다. 지켜야 할 것이 늘어나면 실패가 두려운 것은 당연하다. 또 세상이 어찌 나 빨리 바뀌는지 적응하기 쉽지 않으실 것이다. 거래처 젊은 사장들과 미팅한 날은 수심이 가득하시다. 아마 잘 모르는 요 즘 말들, 영어에다 난해한 용어들을 잔뜩 듣고 오시는 것 같다. 나만 해도 10살 위인 상사보다 5살 아래인 신입사원과 느끼는 세대 차이가 훨씬 큰데 아버지야 오죽하실까. 어릴 때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아는 분이셨지만 이제는 내가 설명하고 가르쳐 드려야 할 것들이 더 많아져 버렸다. 아직은 아버지께 의지도 하고 조언도 구하고 싶은데… 지난달 차를 바꿀 때 내 돈 쓰는 일이긴 하지만 확신이 서 지 않았다. 아버지와 함께 차를 바꿔도 될지, 어떤 차가 좋을지 이런저런 이 야길 나누면서 참 기분이 좋았다. 돈을 떠나서 언제까지고 아버지에게 기대고 무엇이든 의논하고 싶은데 아 마 몇 년 후면 이마저도 못 하게 되지 않을까 쓸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