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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농사를 지내셨던 어머니는 폭력과 첨예한 갈등으로 고국이 분열되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목전에서 지켜보셨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서로를 알아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룻밤의 인연을 맺게 되셨다. 단 하룻밤의 인연으로 한 아이의 부모가 됐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고 계실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숱한 밤들 중 그날이 가장 아름다운 밤이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후 어머니는 나와 세 형제자매들을 키우셨는데, 내 아버지만 유일하게 미국인이었다. 우리는 소규모 농가에서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소작농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초라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그 마을을 사랑했는데, 그곳에는 부유한 사람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가족과 공동체의 유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동체 의식은 내가 이웃 마을에 있는 학교에 입학했을 때, 나를 모욕한 ‘미국인 사생아’라는 명명에서 기인한 내 정체성을 오히려 숨겨주었다. 어머니께는 그런 모욕적인 말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아무 말씀도 없으셨던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셨을 것이다.
열 살이 되던 해, 나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을 찾은 미국인 선교사들은 어머니에게 나를 미국으로 데려갈 수 있다고 했고, 스스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망설이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셨고, 나는 “네”라고 대답했다. 물론 내 선택과 판단에서 비롯된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눈앞에 놓인 기회뿐만 아니라 앞으로 남아있을 더 많은 고통으로부터 어머니를 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래전 그날, 그렇게 나는 오늘처럼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앞으로 내가 어디에 발을 내딛을지, 또 그곳에서 누구와 만날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공항에 도착하자 새 부모님이 되실 분들과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고 그들 역시 한국말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미시간 외곽에 있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침묵 속에서 몇 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심야에 도착한 그 집에는 한 살부터 열일곱 살 까지 모두 열한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줄지어 서서 나를 반겼다. 순간 그들의 친절과 호의에 경직된 나는, 한국에서 또래 아이들이 서로 반겨줄 때 일어날법할 상황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낯선 그곳에서 일주일 정도 지내니 그 아이들과 내가 새로운 형제자매라는 것을, 더 이상 나는 ‘정승헌’이 아닌, ‘Dominic Joseph Pangborn’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후, 학교에 입학한 나는 여전히 영어에는 젬병이었고, 새 형제자매들이 환영해준 것과는 달리 학교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첫날 대면했던 한 아이가 나를 “혼열아”로 불렀는데, 나는 그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불현듯 지난주에 봤던 ‘옴브레(Hombre. 1967)’라는 카우보이 영화가 떠올랐다. 극중 폴 뉴먼(Paul Newman, 1925~2008)은 다른 카우보이들에 의해 발길질 당하고 물어뜯기는, 반은 아메리카인디언 반은 백인인 카우보이를 연기했는데, 모두들 그를 ‘혼혈아’로 불렀다. 순간 정신이 번뜩 들었던 나는 의견을 관철시키며 덤덤하게 말했다. “맞아, 난 그래.”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해할 거라고 기대했던 그 아이는 내가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인정하자 망연자실해졌다. 그리고 전세가 역전되자 두려움 서린 눈동자로 뒤돌아 달아났다.
지금의 나는 한국과 미국에 어떤 차이점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의 ‘특이성’을 포용하고 있다. 나는 단지 모든 백인사회에서 소수자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나는 대학입학 때까지 다른 아시아인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했다. 완전한 미국인이 되기 위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던 것인데, 한국어를 잊은 시간만큼 가능한 한 빨리 영어를 배워나갔다. 스포츠를 하더라도 미식축구를 즐겼던 나는 축구팀에 합류해서도 어떤 편견을 받지는 않았다. 아마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는 개인적․인종적인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여겼을 것이다.
열다섯 살 때, 맥도날드에서 일하면서 래리 허드(Larry Hurd)라는 또 다른 소수자를 만났다. 생애 처음으로 만난 흑인이었던 그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소수자의 입장에서 그와 모종의 연대감이 생겼다. 과거에 ‘혼혈아’라는 말을 들었던 것처럼, 그 역시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런 위치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와 나는 우리 고등학교를 졸업한 최초의 아시아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되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로 이사를 가면서 진정한 다양성과 비로소 마주쳤다. 처음에는 편견도 존재했지만, 수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문화들을 표본으로 삼을 수 있었다.
현재 나는 아내와 미시간에서 거주하고 있다. 세상은 나를 멋진 삶을 살아가는 ‘도미닉 팽본’으로 알고 있지만, ‘정승헌’으로서의 삶과도 여전히 연결되어 있다. 다른 입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내 뿌리를 추적해온 결과 한국에 있는 형제자매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떠난 후 몇 십 년 만에 고국에 돌아와 가족들을 찾은 것이다. 어머니는 슬프게도 그때 당시 돌아가셨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은 그곳에 여전히 머물고 있었다. 세월의 간극을 뛰어 넘어 두 팔 벌려 나를 따뜻하게 껴안아 준 그들과는 끈끈한 친밀감으로 연결되어 있고, 세 명의 조카(첫째 형의 딸들)들은 미시간에서 내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을 돌아서 다시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