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박경서 󰠛 세계인권도시추진위원회 위원장,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

지난 7월18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철폐에 헌신했던 최초의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를 기념하는 행사가 광주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의 공동주최로 광주에서 열렸다. 유엔이 만델라의 생일을 ‘넬슨 만델라 국제기념일’로 지정한 이후 열린 5번째 기념행사에서 박경서 전 인권대사는 세계 비폭력 인권운동의 의의를 밝히고, 광주시가 평화, 인권, 생태, 환경, 화해의 가치를 더욱 추구하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어가길 기원했다. 인권이란 ‘인격적인 삶’과 동떨어질 수 없으며, 우리나라가 인권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가정’에서부터 인권이 삶의 덕목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그의 간곡한 당부를 전한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압제부터 6.25한국전쟁, 군부독재와 민주화 운동 등 격동과 파란의 근현대사를 지나왔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박경서 전 인권대사(75세)는 피로 물든 역사의 현장을 지나며 무자비한 전쟁과 폭력이 한 개인과 가정, 우리 민족과 국가의 삶을 얼마나 황폐케 했는지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는 끔찍한 폭력의 상처와 기억들을 치유하는 길은 오로지 어떤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평화와 인권이 올곧게 실현된 세상을 실현하는 길밖에 없다고 확신하며 부단히 달려왔다. 1988년부터 18년간 국제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국 국장으로서 세계 약 120여 개국을 다니며, 전쟁과 약탈, 살상으로 짓밟힌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인권 수호에 힘썼다. 또한 2001년 대한민국 초대 인권대사로 귀국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 통일부 정책위원회 위원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지내며 대한민국이 인권 선진국으로 거듭나는데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 평화와 인권을 향한 그 길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와 함께할 때, “특정한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인권의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발현되었다. 인권은 강단이나 책상머리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들려준 감동적인 세계인권 수호 현장 이야기가 우리 앞에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

지난 2월, 스위스 제네바로 출장 갔다가 유네스코회의가 파리에 있어 테제베(TGV)를 예약해 놓았다. 당일 역에 도착했는데 그만 예약한 테제베 운행이 취소되었다. 전날 노동조합이 운행을 중단한다는 뉴스를 보도했다는데 누가 그것만 지켜보나,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줄 서서 기다리던 100여 명이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용히 흩어졌다. 뒤에 섰던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으니 “다음 기차를 타면 된다.”는 것이다. “화가 안 나냐?”했더니 “노동자들이 잘하려고 하는 일이니 우리가 참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제네바역은 ‘공동체 인권’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새벽 6시 한산한 도로 위, 다양한 승객을 태운 지하철 안, 빨간 등이 깜박이는 횡단보도 앞, 이런 곳에서 지켜지는 공중도덕이 인권 활동의 첫걸음이다. 우리나라처럼 대놓고 음주운전 단속하는 나라가 OECD국가 가운데도 드문데, 경찰청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때 그렇게 음주단속을 해도 음주운전자가 줄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았다. 위로부터 내려온 명령, 자발적인 것이 아닌 강제의 한계가 그런 것이다. 무엇을 안다고 변화가 오는 게 아니다. 지식은 자기 살과 피에 용해되어야 자동으로 나온다.

마이클 커비 전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위원장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 있다. 그에게 “나는 인권을 ‘화해’라고 본다. 당신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호주에서 대법원 판사까지 지낸 그의 대답은 “인권은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유엔에서는 인권을 ‘보듬어 안듯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아주 투명하고, 평화스럽게, 건설적으로 증진시켜야 한다.’라고 지침을 정해놓았다. 인권은 곧 개인의 권리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한 공동체 인권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내 인권을 주장하기 전에 당신의 인권도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저 사람의 인권이 보장되는 선에서 나의 인권을 주장해야 공동체 인권이 살아난다. 이것이 인권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 길을 가도록 꾸준히 이끌어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본분이다.

인권 실천의 출발은 ‘가정’

독일에서 사회학 공부할 때 큰아들을 영아원에 보냈다. 거기는 아기들 개월 수에 따라 의학적으로 증명된 정량만큼 우유를 주고 더도 덜도 주지 않았다. 이는 공동체에 속한 ‘나’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유럽 사람들 대부분이 어려서부터 자기 음식을 남기지 않도록 교육받는 것도 한 맥락이다. 내가 먹는 일정량은 ‘신이 나에게 주신 음식’이므로 감사히 받고, 이를 남기고 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두 아들 키우면서 내 입장을 강요하거나 억지로 내 뜻을 따르게 하지 않았다. 아내에게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강제하는 것만큼 인권에 반하는 태도는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먼저 평화, 화해, 민주주의, 생태, 환경 등 지속가능한 발전의 인권 목표를 내면화하고, 자녀를 인격적인 ‘세계시민’으로 양성해야 한다. 아이들이 공중도덕을 잘 지키고, 부모님 존경하고, 형제간 우애하고, 친구의 소중함을 가정에서부터 배워 작은 인격체로서 학교에 들어가 그 연속선상에서 지식을 확장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한 인재들이 사회에 나와 인권 선진국을 이루고, 이웃나라까지 돌아보는 통 큰 위인이 되는 것이다. 엄마가 아프면 자녀는 어디를 가나 아픈 엄마 걱정에 힘들고, 아빠가 자꾸 술 먹고 폭력을 쓰면 가족 모두 우울하고 괴로운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2만8천여 탈북자들이 ‘괜히 한국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왔다.’ 하거나, 장애인들이 ‘언제까지 사람 취급 못 받고 살아야 하나?’ 하거나,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은 이렇게 잘사는데 우린 언제쯤 잘살 수 있을까?’ 한다면 우리 사회 전체가 아프고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더불어 사는 사회의 모범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와 국가로 번져가고, 전 세계가 같이 잘사는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